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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인물탐구-섬기는 여인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누가복음 8:1~3. 예수님께서 복음 사역을 하실 때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닌 이유는 다양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고 남는 기적을 본 후에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 따라다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이런 사람이 왕이 된다면 물고기 잡으러 갈 필요도, 고되게 농사를 지을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물위를 걷고, 놀라운 신적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왕이 된다면 로마로부터 충분히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주변 나라들이 범접하지 못할 나라가 건설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런 인기 때문에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어서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흠을 잡아서 그를 잡을 구실을 찾기 위해서 따라 다닌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른 여인들에 대한 말씀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악귀가 나가고, 병 고침을 받은 여인들입니다. 악귀에 사로잡힌 것은 평생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악귀가 지배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여인들입니다. 그 중에 막달라인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린 자’라고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에도 그 자리에 있었고, 장사된 후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순간을 맨 처음 목격하기도 합니다. 귀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무언가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나의 의지보다는 지배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서 간다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날에는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무언가에 의해서 지배를 당한 사람은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을 우리는 ‘중독’이라고 말을 합니다. 마약에 중독이 되고, 알코올에 중독이 되며, 게임에 중독이 된 사람. 때로는 관계 중독, 사랑 중독 등으로 말하는 중독도 있습니다. 이런 삶은 그 중독되게 하는 것으로 인해서 삶이 황폐해져 버립니다.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지 못하게 됩니다.악귀에 의해서 지배를 받던 여인이 그것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는 것은 그 어떤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완전한 치유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청소가 된 그 안에 무엇이 채워지고, 무엇으로 인해서 지배를 받는 삶이 되느냐 입니다. 이 여인은 성령으로 지배를 받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삶은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지켜지고, 보호하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입니다. 병 고침을 받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여인들은 자신의 삶이 병과 악귀로 인해서 황폐한 삶에서 해방이 된 후에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여인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섬기다’는 ‘디아코네오’인데, ‘식사시중을 들다, 돌보다’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은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자기들이 소유로 식사 시중을 들 듯이, 아픈 사람을 돌보고 간호하듯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섬긴 것은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 은혜가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이 구원자이시며,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도 다양할까요? 다양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그가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황폐한 삶에서 구원하신 것처럼 영원한 죽음으로 황폐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구원자이시기에 그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부자가 되고, 권력을 얻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분이 내 삶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성탄절 또한 이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다시 깨닫고, 기념하며, 그 은혜를 기뻐하는 날입니다. 왜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까? 어떤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 열광을 합니까? 그 분이 유일하신 우리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좇는 은혜가 2024년 새로운 한 해에도 우리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인물탐구 신약 구원자이신 예수님 관계 중독 병과 악귀

2024-01-08

인물로 보는 신약성경:동방박사

 마태복음 2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태복음 2장1절. ‘헤롯 왕 때’입니다. 헤롯 왕 때의 유대 땅이라는 것은 로마의 통치하에 있던 시대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의 통치를 받는 식민지상태라는 것은 그렇게 편안한 때가 아닙니다. 헤롯 왕은 B.C 40년에서 B.C 4년경까지 약 35년 동안 유대를 다스립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희망이 있을까요? 어쩌면 그들에게는 가능성이라는 것이 없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이 시간을 ‘가능성이 없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의 경험입니다.      남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의 시대를 지낼 때에도 그들에게는 ‘가능성이 없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헤롯 왕 때’라는 의미는 한 편으로는 ‘바벨론의 포로시대를 기억해야 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시간에서 해방이라는 가능성을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의 길을 걷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를 생각해야 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에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십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구원자가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을 먼저 목격한 사람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과 동방박사입니다.여기에서 동방박사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당시 점성술이 발달한 바벨론, 페르시아 등으로 보기도 합니다. 여기에 박사라는 것은 ‘마고스’로 박사, 마술가, 요술가로 해석이 됩니다.       예수님 탄생을 목격한 사람이 그 많은 유대인들 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나라의 그 중에서도 별을 보며 점을 치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들이 사는 곳이 바벨론이건, 페르시아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탄생’을 알고 자신들의 나라를 떠나서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는 곳까지 왔다는 것입니다.그들이 온 이유는 이렇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태복음 2장2절. ‘경배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경배하다’는 ‘프로스퀴네오’로 ‘예배하다, 절하다, 꿇어 엎드리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그리고 ‘경배하러 왔노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오다는 ‘에르코마이’로 ‘돌아오다, 돌아가다’의 뜻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사는 나라, 그리고 그 나라가 섬기는 신으로부터 돌이켜서 메시야,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서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당시 동방의 나라로부터 유대 땅까지는 약 1000마일의 거리입니다.ㅡ 당시의 교통수단으로는 많은 날들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이 거리를 별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구약의 말씀에 예언된 유대 땅에 나실 메시야, 그리스도를 보고, 자신이 섬기는 신으로부터 돌이켜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12월이면 성탄절로 모든 사람들이 열광을 합니다. 그런데 왜 열광합니까? 단순한 공휴일이 아니라, 이날은 구약에 예언하신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날입니다.      이 날을 기뻐하는 것은 동방박사처럼 그에게 ‘돌이켜 경배하기 위함’입니다. 동방박사의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마태복음 2장3절. 여기에 ‘소동하다’는 ‘타랏소’로 ‘뒤흔들다, 혼란케  하다’의 뜻입니다. 헤롯 왕이 소동한 것은 자신의 권력이 빼앗길 것에 대한 두려움이고, 온 예루살렘이 소동한 것은 이제 헤롯 왕의 심기를 건드려서 유대인들이 탄압을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정작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담대합니다. 이것이 믿음이어야 합니다. 다가오는 이번 성탄절에는 그 의미를 바로 알고,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우리의 경배를 올려 드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칼럼 / 더비전교회 윤우식 목사신약성경 동방박사 구원자이신 예수님 메시야 그리스도 유대 베들레헴

20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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